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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오사 10인 청춘 앤솔로지

Suna Rintaro X Miya Osamu Anthology

[ 폭염주의보 ]

마지막 아님 뭐 by삐쀼

올해만 벌써 네 번째 헤어짐이었다. 뙤약볕을 피해 들어간 냉랭한 카페에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헤어지자고 합의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쓸데없이 발목을 붙잡아온 꽤 많은 괜찮은 추억들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토록 고대하던 첫 파리 여행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성인이 되어. 애인과. 자비로. 떠나는 첫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으로 버티며 스무 살 형편에 피땀 흘려 번 여행자금을 공중분해할 수는 없었다. 고작 이별 따위로 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은 돈뿐만 아니라 제 스무 살 청춘을 날려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와 근 며칠간 줄곧 책상 위에 붙박여있던 프랑스 관광책자를 보고 나서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스나와의 여행을 떠올린 오사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도 없이 결단을 내렸다. 그딴 새끼랑 헤어진 게 무슨 상관이냐. 나는 내 돈 내고 내 청춘을 즐기러 가겠다. 에펠탑이 보이는 방의 킹사이즈 침대도, 큰 맘 먹고 예약한 마지막 날의 스위트룸도 혼자 실컷 즐겨주마.

그리고 대망의 출국 날, 편안한 츄리닝 차림의 미야 오사무가 일주일치 캐리어와 함께 당당하게 공항에 입성했다. 난생 처음으로 혼자 체크인 수속을 하고 수화물을 부치고 탑승 티켓을 받았다. 이런 걸 혼자 하는 나이가 되다니, 진정한 어른의 길로 두 발짝쯤 나아간 기분이었다.

기내식은 네 입 거리밖에 안 되니 탑승동에서 미리 식사를 하고 탑승시작시간을 기다리며 손에 챙겨온 관광책자를 펼쳤다. 동행도 없으니 귀한 일주일을 온전히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들여다본 관광지와 먹음직스러운 음식사진들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두근두근한 표정의 오사무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여권과 티켓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시 잘못된 건 없겠지, 하며.

승무원에게 여권과 티켓을 보여주고 홀로 게이트에 올랐다. 유리창 밖으로 탁 트인 활주로가 펼쳐지자 심장박동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었다.

청춘의 한 페이지. 이 순간을 위해. 스무 살. 성인. 유럽. 파리. 미식의 나라. 어깨에 멘 크로스백 끈을 꼭 쥐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근처의 다른 승객들이 짐을 올리는 것까지 도와준 뒤 창가 자리에 착석했다. 슬슬 어둑해지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무릎 위에 얹은 손이 제멋대로 꼼지락거렸다. 자리를 찾고 짐을 올리느라 부산한 주변의 소음과 기척도 가뜩이나 붕 뜬 기분을 더더욱 나풀거리게 했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것도 아닌데, 혼자 떠나는 먼 타지로의 여행이란 정말 신비한 것이었다. 빨리 출발하면 좋겠다. 간지러운 기분에 어깨를 뒤척이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본 오사무가 우뚝 굳었다.

브이넥 티셔츠만큼이나 시커먼 그늘을 드리운 얼굴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실둥실 부유하던 공기가 한 순간에 무거운 적막에 짓밟혔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응시했다. 로맨틱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 사이 다른 승객이 좁은 통로를 막고 선 스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저 역시 상대가 여기에 와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감과 참담함을 숨기지 못하고 꽉 다물린 입술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오사무가 마침내 취한 행동은, 그저 말없이 도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또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있던 스나가 결국 조용히 옆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용 캐리어를 짐칸에 올릴 때까지 오사무는 필사적으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내려라.

[승객 여러분, 오늘도 Air France를 이용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각기 설렘과 불안으로 들뜬 기내에 상냥한 음성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란히 앉아 서로 반대로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목울대가 비장하게 꿀렁였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

[목적지인 파리 샤를드골 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대략 12시간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려 12시간을 더 가야 한다. 혼자였어도 피곤할 장시간 비행을, 일주일 전 대차게 헤어진 전 남친과 딱 붙어 앉아서.

[우리 비행기는 곧 문을 닫고 출발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좌석벨트를 확인해주시고,]

지금이라도 내려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비행기는 곧 문을 닫고,]

다시 한 번 말한다. 지금이라도 내려라.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활주로를 구르는 기체의 격렬한 진동에 몸을 내맡긴 오사무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비행기에 오른 것이 얼마나 맹랑한 선택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제가 아는 스나 린타로는 헤어진 애인과 가기로 했던 여행을 혼자서라도 떠나는 구질구질한 인물이 아니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프로배구선수니만큼 돈도 많고, 앞으로도 떠나려면 비시즌 때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놈 아닌가.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이륙하겠습니다.]

기체의 진동이 점차 거세졌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자존심이 셌다. 기질은 오사무가 확실히 더 셌지만 살벌함은 스나가 조금 더했다. 양쪽 모두 관대한 성격이 아닌 것치고 곧잘 넘어가주는 편이었으나 져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친구 사이일 때는 그저 원만하던 일상이 연인이라는 둘만의 관계로 묶인 순간부터 사소한 마찰과 충돌이 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누구랄 것 없이 우위를 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재결합을 반복하다 지긋지긋하게 끝을 냈으니 이 상황에서 둘 중 한 쪽이 꼬리를 빼거나 꼬리를 말고 들어올 리가, 하다못해 네가 왜 여기에 있냐며 말을 걸 리조차 만무했다.

그때 기체의 바퀴가 활주로를 박찼다. 덜컹거림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세상이 고요해졌다. 오사무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다시 창밖을 살폈다. 지면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의 두 청년을 태운 비행기가 향하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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