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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오사 10인 청춘 앤솔로지
Suna Rintaro X Miya Osamu Anthology
[ 폭염주의보 ]
썸머 레인 by팥
그 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와 표정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 애와 노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그 애는 오사무에게 계곡의 작은 물고기를 물과 함께 손에 담는 법을 알려 주었고, 산에 사는 동물들을 몰래 구경하기도 했다. 풀숲에 숨어 제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빤히 쳐다볼 때면 오사무는 재밌는 비밀이라도 생긴 것마냥 작게 킥킥거렸다. 그는 그렇게 아츠무와 화해하는 것도 잊고 며칠을 그 애와 만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애는 아마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로 약속을 하진 못했으나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오사무는 여름방학만 되면 그 애를 찾아 산을 올랐다. 아츠무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서려고 할 때마다 의심 가득한 눈빛이 오사무의 뒤를 따라붙었지만, 유치하게도 왠지 그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만난 지 3년째 되던 해에, 오사무는 그 애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내 이름, 미야 오사무다. 미야 오사무.”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그 애는 입 모양으로만 오사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움직이는 그 입술을 보는 순간, 오사무는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환청이 들린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 오사무가 여름방학에 그곳을 찾는 일은 없었다.
성년의 나이를 앞두고서야 다시 찾은 장소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오사무는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서 오게 된 마을을 둘러보며 짧게 자조했다. 여전히 이곳의 경치는 아름다웠고, 산에서 불어오는 내음을 맡으며 발이 빠지는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금방이라도 어린 날의 자신을 다시 불러낼 것만 같았다.
“너무 오랜만이다. 정말 혼자 온 거야?”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여름엔 너희 쌍둥이 보는 재미에 지냈는데, 안 오니까 적적했지.”
몇 년 만에 마주한 친척에게 안부를 전하고,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방 한 켠에 짐을 풀었다. 그러고 나니 우습게도 할 일이 없었다. 옛날엔 뛰어놀기만 해도 하루가 꼬박 모자랐었는데, 훌쩍 커 버린 오사무는 제 쌍둥이도 없이 혼자 특별히 시간을 때울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볕이 잘 드는 침대에 누워 눈만 깜빡이고 있었을까.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든 오사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친척의 펜션은 바닷가와 가까이에 있어 창밖만 내다보아도 절로 시원해지는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물론 해가 비추는 낮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조금 더 가까이서 바다가 보고 싶었다. 어렸을 땐 당연히 늦은 시간에 나가지 못했으니 색다른 경험일 터였다.
산책을 핑계로 밖으로 나서자마자 어둡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로 가득 찬다. 간간이 놓인 가로등은 어두운 길을 전부 밝히기엔 모자란 감이 있었다. 오사무는 느린 걸음으로 바닷가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짭짤한 바다 내음이 섞인 바람이 머리칼을 타고 흐르고, 슬리퍼 사이로 스미는 모래에 발바닥이 간지러워졌다. 한참을 아무도 없는 곳을 걷고, 또 걷다가 해변 구석에 놓인 낡은 플라스틱 선베드에 몸을 맡겼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비추던 달빛이 파도와 하나 되어 부서진다. 영화 속에서나 펼쳐질 법한 광경을 조용히 눈에 담는 동안,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혼자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아름답게 빛나던 수면 위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반사적으로 그곳을 바라본 오사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한 남자였다. 새하얀 피부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머리칼이며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수면 위로 떨어졌다.
“어…….”
오사무의 입에서 얼빠진 듯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파도와 바람이 이는 소리뿐이었던 이곳에서, 소음으로 여길 수도 없을 정도로 작고 짧은 탄성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물 위에 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오사무에게로 향한다. 그는 한참이나 오사무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고개를 돌렸다. 퐁당. 그리고는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자가 나타났던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파도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혹시 요새 내도 모르게 힘들었었나. 그래서 내가 헛것을 본 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펜션으로 향한 오사무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자신의 목격한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다가 겨우 잠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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